기타
사는 게 뭐라고
★★★★

밀리언셀러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사노 요코가 2003년부터 2008년, 세상을 떠나기 2년 전까지 쓴 꼼꼼한 생활 기록. 간결하고 독특한 문체가 시원시원한, 한 편의 소설 같은 예술가의 내밀한 삶을 읽는다.
1
kwonna
북카페에서 읽던 책이 밀도가 너무 높아 환기할 겸 꺼내 봤는데 재밌고 술술 읽혔음.
05.30 19:20
2
kwonna
41p
할 일이 없어서 옆 침대를 봤더니 얼굴이 가려진 새하얗고 통통한 여자의 민몸이 천장을 보고 누위 있었다.

과연 여체는 아름답다. 화가들이 까마득한 옛날부터 여자 몸에 푹 빠져 질리지도 않고 계속 그려댄 심정이 이해된다. 통통한 여자는 르누아르의 누드화 모델 같다.

여자의 벗은 몸 한가운데에 털이 나 있다. 남자들이 비너스의 언덕이라고도 하는 곳. 야트막한 산처럼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그곳에 털이 나 있다.

그 장면을 보노라니 기타카루이자와의 겨울 산이 생각났다. 잎이 진 검은 나무가 새하얀 산릉선을 따라 코끼리 등의 잔털처럼 자라 있었다.

여름에는 잎사귀가 울창하게 자라서 산릉선은 보이지 않는다. 설산의 능선 위로 펼쳐진 새파란 하늘.

옆 침대 여자의 하얀 산 위 겨울나무를 보고 있자니 기타카루이자와의 설산을 보러 가고 싶어졌다. 다시 몸을 뒤집어 오일 마사지를 받았다. 아. 기분 좋다.

때밀이가 끝난 다음 쑥 사우나에 들어갔다. 젊은 여자가 있었다. 역시 젊은 여자의 나체는 완벽하게 아름답다. 나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젊은 여자의 몸을 관찰했다.

그러다 털이 난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젊은 여자의 산은 한여름이었다. 뭉게뭉게 활활 타오르는 젊은 나무 잎사귀였다. 산 능선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울창하고 새까했다.
05.30 19:21
3
kwonna
59p
나는 노인이 된 이래 적어도 자세만은 똑바르게 걸으려고 언제나 신경 썼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딱 마주친 지인이 말했다. "뭘 그리 거만하게 으스대며 걷는 거야." 세간은 어렵다.
05.30 19:24
4
kwonna
66p
돈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필요할 때는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물건이 없다. 필요한 건 에너지다. 운전을 하면서 일보다는 절약을 하기로 결심했다.
05.30 19:25
5
kwonna
117p
욘사마가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고 웃을 때면, 나는 아아, 저 얼굴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욘사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불가사의한 존재다. 나는 욘사마를 남자로 좋아하는 걸까? 지금에 와서도 확실하지가 않다.

가부키의 여자 역할을 맡은 남자 배우도 아니고, 다카라즈카의 남자 역할을 하는 여자 배우도 아니며, 그렇다고 남장 여자도 아니고, 여자는 더더욱 아니다.

"엄마, 욘사마 나왔어!" 아들이 외친다. "아니, 난 별로...." 하고 중얼거렸더니 "엄만 욘사마가 안 나올 때만 화장실 가잖아"라고 한다. "그래도 내 타입은 아닌데...." "스스로에게 솔직해져봐." 그래도 나는 잘 모르겠다. 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05.30 19:26
6
kwonna
아줌마들은 외롭다. 할 일이 없다. 인생은 이제 내리막길이다. 집에는 꾀죄죄한 아저씨가 늘어져 있다.

(중략)

몸이라면 더 이상 안 써도 괜찮다. 성가시다. 하지만 사랑은 받고 싶다. 애정으로 한가득 채워지고 싶다. 그것도 두 사람에게 죽도록 사랑받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드라마가 이루어지려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드라마에는 섹스 장면이 없다. 키스조차 드물다. 얼굴을 맞대고 껴안는 정도가 딱 좋다. 한국 드라마의 남자는 일본 남자라면 부끄러위한 만한 일
을 해연하고 당당하게 해치운다.

장미꽃으로 하트를 그리고,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서도 이름을 부르며, 눈이 먼 여자를
위해 목숨을 끊어 자신의 각막을 이식한다.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와 그런 게 바보 같다고 여기는 건 이성이다. 이성은 모순을 허락하지 않지만 감성은 모순의 마그마다. 무엇이든 들어오라. 어서 들어오라.
05.30 19:29
7
kwonna
137p
나는 아줌마다. 아줌마는 자각이 없다. 미처 다 쓰지 못한 감정이 있던 자리가 어느새 메말라버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서야 그 빈자리에 감정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 드라마를 몰랐다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브라운관 속 새빨간 거짓말에 이렇게 마음이 충족될 줄 몰랐다. 속아도 남는 장사다
05.30 19:34
8
kwonna
145p
문득 돌아보니 나는 요즘 시대에 완전히 뒤처져 있었다.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나도 끝났다. 이 시대에서는 더 이상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이를 어쩌나, 하지만 내 심장은 아직까지 움직이고, 낡아빠진 몸으로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이를 어쩌나. Y씨, 미안해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말았어요. 내다 버리세요.
컴퓨터는 메이지유신보다도 격렬하게 일본을, 아니 전 세계를 뒤바꾸었다.

아, 기분이 언짢다. 나는 달에 가고 싶은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이 세상이 싫다, 정말로 넌더리가 난다고 외치고 있다.

에도시대였다면 예전에 죽을 수 있었을 텐데. 가마쿠라시대의 평균수명은 스물넷이었다고 한다. 부럽다.
05.30 19:35
9
kwonna
187p
모모 언니는 나이를 먹으며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늘었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외로운 독거노인은 주변에 화낼 소재가 떨어지면 점차 천하와 국가를 논하며 울분을 토한다.

하지만 일본의 할머니가 천하와 국가를 근심해봤자 천하와 국가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천하와 국가는 더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따름이다.

천하와 국가는 50년 전에 비해 몹시 커졌고, 지금도 커지고 있다.

이라크 전쟁으로 불탄 마을에 사는, 눈이 뎅그렇고 이마가 번들거리는 먼 나라 소년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나는 열한 살에 죽은 오빠를 떠올린다. 오빠는 커다란 눈에 불안을 담고 이마를 번들거리며 비쩍 마른 채 살다 죽었다.

50년 전에 나는 이라크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무수히 많은, 정리할 수조차 없는 정보의 단편들이 나 같은 늙은이한테까 쏟아져서 세계를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죽는 다는 사실이다.
05.30 19:38
10
kwonna
188p
"잘 먹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은 식사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지 않은 식사란 어떻게 끝나는 걸까.
05.30 19:41
11
kwonna
223p
곰곰이 생각해보니 변태 할아범이 젊은 여자에게 침을 흘리는 기분도 이해가 된다.

(만약이라는 가정 아래) 할멈이 된 나에게 적당히 나이 먹은 할아범이 친한 척 접근한다면 '잠깐만, 당신은 할아버지라고, 너무하잖아?'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겠지. 대머리잖아, 뚱뚱하잖아, 주름투성이잖아, 좀 심하잖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가 이미 할머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남들이 나한테 빈말이라도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고 말해주는 경우는 없었다. 내 눈은 초롱아귀처럼 얼굴 앞으로 축 늘어져 있지 않으니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화사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보다 열 살이나 젊은 남자라면 예순에 가까울 테니, 그건 제법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반성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우쭐거렸군요
05.30 19:43
12
kwonna
231p
변태 할아범은 공인되어 있다.
하지만 변태 할멈은 실성한 사람이다.

요쥬 나는 무언가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하려던 게 무엇인지 까먹는다. 그러고는 망연자실 서 있는다. 하루에 몇 번이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 망연자실 서 있는다.

엄마가 망연자실 서 있는 것을 내가 눈치챈 무렵부터 엄마의 치매가 시작되었다.
내가 그럴 때면 공포가 덮쳐오지만, 가만히 선 채 자기 머리를 딱딱 때리며 "뭐였더라, 뭐였지?!"라고 외치는 친구도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된다.
05.30 19:45
13
kwonna
242p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젠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시트는 나를 안전히 지키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쓸데없는 서비스는 하나도 없었고 마음으로부터 신뢰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05.30 19:47
14
kwonna
244p
목숨은 지구보다 중하다는 말은 믿을수 없다.
이라크 아이의 목숨과 장기이식에 몇억 엔이나 쓰는 사람의 목숨은 같지 않다.

나도 목숨을 아끼고 싶지 않다.

오빠는 열한 살 때, 동생은 네 살 때 이라크 아이들처럼 죽었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은 지구보다 무거울지도 모른다.

싱글벙글 씨는 내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사노 씨, 먼저 가서 터 좀 닦아놔. 내 자리도 좀 봐놓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
05.30 19:48